A Room of One's Own
청소년을 위한 고전 텍스트 읽기 본문
청소년 인문학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내가 최종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고전 읽기’였다. 청소년 감성에 맞는 세련된 강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톨레레게 역시 이를 위해 많은 시간을 세미나에 할애해 왔지만, 솔직히 말해서, 시청각 자료 및 놀이 활동을 활용한 프레젠테이션식 수업의 한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마다 견해의 차이가 있겠지만, 내가 경험한 인문학은 텍스트 읽기를 통해 비로소 시작되고, 이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그래서 지루하다는 이유로, 때로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추방당한 텍스트 읽기를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수업의 중심으로 다시금 가져다 놓고자 하는 시도는 인문학의 전통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나름의 작은 책임을 지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삼킨 올빼미>는 말하자면 인문학 전통으로의 회귀다. 여기에는 학생을 혹하게 할 어떠한 트릭도 없다. 오직 텍스트가 발현해 내고 있는 위대한 통찰과 이를 세상에 끄집어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어느 사상가의 치열한 고뇌가 있을 뿐이다. 이것만으로 충분히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 독자가 10대 청소년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작업은 당연히 녹록지 않다. 가르치는 사람이 텍스트를 분석적으로 읽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텍스트는 그저 인쇄된 종이 더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를 비롯한 동료들 모두가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결코 태만해지지 않고, 좋은 스승 밑에서, 그리고 서로 모여서 끊임없이 텍스트를 읽고 공부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늘 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공부하지 않는 선생은 그 누구에게도 공부하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더불어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그리고 강의를 기획하거나 의뢰하는 사람 모두 당장의 변화에 집착하기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텍스트 읽기 교육을 바라봐야 한다. 인문학 공부는 [이 또한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견해일 테지만] 훈련이고, 훈련은 오랜 시간 동안의 습관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므로 이른바 단기적인 성과주의에 흔들리지 않는 인내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오래전부터 시도해왔던 이 일을 이제는 동료들과 함께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하려 한다. 지금까지 톨레레게가 그랬듯, 결코 서두르지 않고, 집요하면서도 성실하게 공부하고 토론하면서 우리 각자가 경험했을 인문학으로부터의 위안과 도전을 청소년들도 경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톨레레게 <책을 삼킨 올빼미> 프로그램 바로 가기: http://tollelege.org/xe/program/17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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